[단편] Infield Fly 소설Novel



Hieronymus Bosch,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1503∼1504, 220X194cm, 패널에 유채




/overrun

 나는 연신 눈만 껌벅였다. 반사적으로 탁자 위를 더듬어 휴대전화를 들었다. 화면을 켰지만 눈
이 아직 초점을 맞추기 버거워했다. 취기는 아직도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
지 않아 금방이라도 풀썩 꺾일 듯 했다. 머릿속은 마냥 혼란스러웠다.

 12월 8일 늦은 아침이었다. 어젯밤 위스키에 진탕 절여진 뒤 스며들 듯 들어선 모텔 방 한 가운
데, 내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한손에 리모콘을 반대편엔 휴대전화를 든 채였고, 은은할 뻔도 하다
가 촌스러움에 머문 간접 조명이 방 안을 밝혔다. 커튼이 굳건한 탓에 날씨는 알 수 없었다. 실은
여기가 정확히 시내 어디 즈음인지도 명확치 않았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5초 정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벌거벗은 채였고 방 한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
한 욕조도 사라지지 않았다. 간밤에 흘린 체액은 사타구니에 말라붙어 불쾌한 촉감을 자아냈다.
내 발 앞서 늘어져 있는 시체도 그대로였다. 널브러진 유진의 오른손엔 내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약액은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 탓에 그 알몸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일단 경찰에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래저래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숙
취가 깊고 오랠 모양이었다.


/passed ball

 캐주얼 자켓 단추를 잠그고 코트를 걸치는 찰나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경찰 일단이었다. 박력
만 치면 문짝을 부수기라도 할 기세였지만, 실은 내가 겉옷을 걸치기 전에 이미 열어놓은 문을 가
볍게 당겨 열고 들어왔다. 나는 가만히 두 손을 들며 가죽 장갑을 마저 꼈다. 경찰 한 명이 날 붙
잡아 이끄는 동안, 나머지는 사진을 찍고 테이프를 치고 현장을 살피느라 분주했다. 내가 원하는
건 괜한 오해를 사지 않는 것 하나 뿐이었다. 내 옷과 전화를 제외한 기물엔 손도 대지 않았고, 그
건 유진이 뒤진 게 틀림없는 내 가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명이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화장실
을 찾다가 유진의 발을 걷어차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물감은 꽤나 생소한
것이었다.

 내 팔을 잡고 이끄는 형사는 남색 파커를 입은 채였다. 소매 부분이 낡아 있었는데 그건 강퍅한
턱 선에 듬성이는 수염과 곧잘 어울렸다. 나는 팔에 잠시 힘을 주고 버텼다. 근육질과는 거리가
먼 몸뚱이였지만 형사의 주의를 끌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나를 돌아보는 형사에게 눈빛을 보내
고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방 안을 훑어보았다. 어제 문을 열고 들어서던 기억이 어렴풋이 스쳤
다. 멈춰 선 내 눈에 유진의 육신이 그야말로 적나라했다. 유진은 날 등진 채 옆으로 누워있었고
고개는 천장을 향해 살짝 돌아있었다. 입구 쪽에선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
등을 보았다. 10년의 시간은 턱선 뿐만 아니라 허리 등지에도 자리를 잡아 눌러 앉은 듯 했다. 이
제 전성기가 지난 여자의 육체는 서서히 무너지는 와중이었고 파리한 피부색이 둔해진 몸의 굴곡
을 강조했다. 팔다리는 기억 속처럼 나긋하지 못했다. 언뜻 보이는 눈꼬리의 화장이 짙었다. 커튼
이 걷혔다. 창은 크지 않았다. 그 사이로 새어든 햇살이 반지에 비쳐 반짝였다. 그러한 색조 화장
은 생경했다. 서글픈 일이다. 지금의 나는 유진이 내 등에 손톱자국을 남기던 어젯밤보다도 분명
히 그 몸뚱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건 여자의 모습이 내 머릿속 ㅡ 기억 속과 현실 사이
에서 괴리하고 있단 걸 의미하는 탓에 서글펐다. 밤과 어둠의 세례도 받지 못하고 젊음의 향기도
어느샌가 빠져 나간 채 숨을 멈춘 이 개체는, 내가 애증했던 동물인 동시에 아니게 된 것이다.

 생명의 윤기가 바닥에 스며들어 버린 순간부터 단백질은 무너져 변성을 시작한다. 문득 두개
골이 대뇌를 조여 오는 듯 아팠다. 나는 내가 옷을 입는 동안 줄곧 유진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음
을 깨달았다. 입에 담은 것도 없건만 소태라도 문 것처럼 참을 수 없었다.

 ㅡ갑시다.

 형사는 때마침 내 팔을 잡아끌었다. 무너질 것 같은 걸음으로 문지방을 넘는데 내 눈은 삭아가
는 살덩이에 붙박혀 있었다. 그 시선이 벽에 가로 막힌 후에도 그랬다. 복도 꼴은 우스웠다. 경찰
은 탐문하려 했고 그 대상들은 한 시라도 바삐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모텔 주인만 폭격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멍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발소리를 먹었다. 내 구두는 소리 없이 바닥을
핥았다. 엘리베이터는 쉼 없이 오르내렸고 나와 형사는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했다. 엘리베이
터 안은 반투명 거울을 둘러 쳐 밝고 화사했는데, 한켠엔 모텔키를 반납하는 아크릴함이 조잡했
다. 바닥은 복도와 마찬가지로 붉은 카펫이었다. 붉은 빛 위로 지나가는 검은 색 물결무늬가 현란
했다. 바라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왈칵 일었다. 나는 그 위에 그대로 구토했다.


/one point relief

 ㅡ그래서 이유진 씨하고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죠.

 질문을 듣고 나는 그 문장을 혼자 조용히 다시 씹어 음미했다. 형사는 나에게 물었지만 나는 다
시 나에게 물어야 비로소 대답이 가능할 듯 했다. 형사과는 몇 번 들러본 적이 있었다. 재작년 승
부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이는 주변 풍경은 조금 낡은 축에 드는 보통 사무실과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출입구에 전자식
자물쇠가 달린 철창문이 특이할 뿐이다. 일렬로 늘어선 책상의 한쪽은 경찰들을 위한 공간이었
고, 나머지 한쪽은 방문객들을 위한 것이었다. 플라스틱 의자는 기댈 곳도 팔걸이도 없어 불편했
다. 호프집 야외 테이블에 쓸 법한 의자였다. 형사는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보며 타자를 쳤는데,
편안히 키보드에 손을 올린 형사와 달리 나는 손을 둘 곳이 없었다. 앞으로 기대기에는 책상의 높
이가 애매했다. 엉거주춤한 채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유진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
는 것인가. 아니,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인가. 한마디로 대답할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정의
는 매번 실패해온 작업이었다. 새삼스레 돌이켜 보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명확한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늘 되새겨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간에.

 비도 눈도 아닌 모호한 것이 떨어지던 날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도 규정집은 머릿속
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실제 눈앞에서는 직관으로 명확한 것들이, 줄글로 옮겨놓은 종이 위에
선 명료하지 못했다. 문장이 말하는 것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옮겼다가, 그걸 다시 판단하여 문
장으로 엮어내는 건 고단한 작업이었다. 읽어 내려가던 문자열이 한번 튕겨나가자 그 뒤로는 계
속 숨이 가빴다.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산책이나 나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창밖을 보
자 이내 그런 마음은 사그러들었다. 유리창에 맞닿은 수분 중 어떤 것은 창틀에 쌓이고, 어떤 것
은 창문에 치덕치덕 붙고, 어떤 것은 녹은 채 흘러내렸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었다. 눈이라면 맞
고, 비라면 우산을 받칠 것인데 어느 쪽을 선택하기에도 만족스럽지 않은 날씨였다. 때문에 방 안
에서 해결을 보기로 결정했다. 그 순간 옆방에서 묘한 소음이 들려왔다.

 여느 고시원들이 그렇듯 여기도 방음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되었다.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괴로울 때면 인이어형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거슬리는 소리의 종류는 다양했다. 크
게 튼 음악이나 드라마부터 시작해서 그 좁은 방에서 술판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침
대가 삐걱거리는 소리 위로 격한 신음이 얹어 오는 때도 있었다. 어떤 것이나 불쾌하기는 마찬가
지였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것은 그리 흔하게 들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는 문과 벽을 타고
스멀스멀 기듯이 흘러들어왔다. 처음에는 금속성의 까득대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 열쇠 구
멍을 후비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소리가 멎었다가, 이번엔 거칠게 문고리를 돌려보는 소리가 들
렸다. 그 또한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었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두 차례 무언가를 문에 부딪히는 소
리가 다시 들렸고, 그 다음은 망치질을 하는 소리였다. 나는 거기까지 듣다 말고 뛰쳐나갔다. 빈
집털이범을 상대할 준비는 나름으로 되어있었다. 한손엔 야구방망이를 들고, 허리춤엔 칼집에
넣은 과도를 든 채였다. 애초에 덩치는 큰 편이었다. 방문을 벌컥 열고 소리가 들려온 옆방 쪽으
로 눈을 부라렸다. 기선제압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니까.

 다만 거머쥐고 나간 배트와 과도를 쓸 일은 없었다. 나보다 머리 한 개 반은 작은 여자가 멀뚱
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밖을 뚫고 왔는지 흠뻑 젖은 채였다. 오른손엔 어울리지
않는 망치가 들려있고 복도 바닥엔 동네마트 로고가 박힌 비닐봉지가 늘어져 있었다. 봉지 안으
로 얼핏 김치 봉지와 고기 덩어리가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채로도 여자의 손은 물 흐르듯 움직여
서 방문은 스르르 열렸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서있는 사이, 여자는 짐을 주섬주섬 챙겨 방
안으로 사라졌다. 기억컨대 분명 3층은 남성용 층이었다. 옆방 남자는 늘 조용해서 사생활을 알
수 없는 자였다. 나는 혼자 우두커니 남겨져서, 도대체 그 앞뒤를 알 수 없었다.

 나는 5개월 뒤에 그 이상한 여자와 말을 트고, 그로부터 다시 8년 11개월 뒤에는 그 사체의 최
초 발견자가 되는데 이걸 무어라고 해야 하는지는 그날만큼이나 모호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
와 마주한 형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자세를 바꾸며 나는
가까스로 말했다.

 ㅡ그러게요. 뭐였을까요.

 형사는 날 마치 썩어가는 고양이 시체 보듯 했다.


/head hunter

 상원은 유난히 인상이 옅은 남자였다. 인상보다는 존재감 자체가 옅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런지도 모른다. 처음 대면하자마자 몇 명의 얼굴이 겹쳐보였는데, 그 중 이름이 기억나는 얼굴은
없었다. 교실 뒷켠에서 조용히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아이들은 반에 한둘 정도 꼭 있었다. 졸업
앨범을 훑다가 그제야 문득 기억나는 그런 류의 인물들. 아니 비단 지금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매
일같이 공간을 공유하던 그 당시에도 종종 이름을 까먹게 되는 이들이었다. 상원은 그런 얼굴들
을 하나로 모아 조물거린 뒤 분칠을 해놓은 듯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그 정도 느낌을 주었으니,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의 공백감이 어느 정도일
지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옅음이 나쁘다거나 온전히 상원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
미는 아니다. 어쩌면 그 남자의 묽음은 주변 인물들의 진함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멱
살이 잡힌 채로 잠시간 해보았다.

 장례식장은 사망 장소에서 가까웠지만, 실상 사체는 부검을 위해 강북을 한 바퀴 돈 뒤에야 다
시 신촌으로 돌아온 셈이 되었다. 유가족 중 나와 이전에 얼굴을 튼 사람은 없었다. 내가 조사를
받고 유가족이 연락을 받고 어쩌고 하는 일련의 수습 과정 동안 서로의 동선은 오묘하게 엇갈렸
다. 그러니 사실 나는 내 입장을 딱히 그렇게 솔직히 밝힐 이유는 없었던 셈이다. 조의금 테이블
에 앉아있던 청년은 방명록에 적는 이름을 유심히 본 뒤 날 바라보는 표정이 변했고, 어느 샌가
유진의 부모와 장모는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금세 주변엔 사람들이 들러붙어 구
경거리를 넘겨다보았다. 상원은 그 너머에서 나를 힐끗거리며 보았다. 상주임을 나타내는 완장
과 행동거지 등을 보고 나는 그가 유진의 남편이었음을 알았다. 유진이 예견했던 대로, 상원은 결
코 울지도 흥분하지도 않은 채 묵묵했던 탓이다.

 ─괴로웠을까요?

 결국 식장에서 쫓겨난 뒤 장례식 앞 흡연구역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자판기에서 뽑아
온 식혜는 달았고, 밤공기와 함께 찼다. 나는 상원이 벤치 뒤로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때문
에 상원이 전조 없이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인상만큼이나 발걸음 소리도 옅은 작
자였다. 상원은 어느 샌가 벤치에 몸을 기대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내가 벙 쪄 있는 사이에 상원은 혼자 이야기했다. 목소리엔 분노 같은 감정의 찌꺼기조
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 남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존재감은 원래부터 감정의 크기와 연계
되어 있는 물건이었던가.

 ─인터넷을 좀 찾아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과 쪽은 영 체질이 아니라.

 말을 고르는 사이에도 상원은 주절댔다.

 ─테스토르? 테토르드? 여튼 그 복어독이라는 얘기는 경찰한테 들었습니다. 찾아봐도 뭐 이게
먹을 때만 문제인 건지 아닐 때도 문제가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어르신들은 장례 절차다 뭐다
따지느라 바쁘고. 경찰 쪽 조사는 뭐 다 끝내고 오신 건가요? 애초에 그걸 어디서 구해다가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 공기가 찬데 어디 좀…….

 ─죽는 방법 중 괴롭지 않은 것은 없지요.

 말허리를 끊고 들어가자 상원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쉬운 죽음 같은
건 없었다. 화학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멀쩡히 살아있는 육체를 정지시키는 건 강제력을
띈다. 그 강제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 감각기관이고, 그 중 맨 앞에 서는 것이 통각이다. 언제나
그렇다. 몸을 던져도, 농약을 마셔도, 목을 매도, 스스로의 배를 갈라도 언제나 고통은 뒤따른다.
숨을 참아 자살하는 건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닌 담에야 불가능하다. 몸뚱이는 그렇게 만들어졌
고,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맥을 이어왔다. 그러니 상원의 우문에 대해 내가 답할 수 있는 말
은 몇 번을 묻더라도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청나게 괴로웠을 겁니다. 당연히 괴롭지요. 테트로도톡신은 신경독인데 기본적으로는 몸
을 마비시킵니다. 처음엔 따끔거리고 저리다가 점차 감각이 없어지고 힘이 없어집니다. 의식엔
영향을 그다지 안 주고 호흡곤란을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 질식사하거나 부정맥이 오거나 했겠
죠. 그렇게 죽은 겁니다.

 내가 쏘아붙이자 상원은 잠깐 딴청을 피듯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옅은 웃음
을 띠웠다. 그리고 다시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하.

 순간 나에겐 상원의 쌍꺼풀 없는 눈과 그 동공 안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같은 것이 보
였다. 단순한 안구와 그 체액이 아닌 무언가가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
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기에는 비친 시간이 너무 짧았다. 나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눈을 피했고, 상원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럼 누가 그렇게 미웠던 겁니까. 제 집 사람이? 아니면 그 쪽 자신이? 어느 쪽이었죠?


/run down

 정제된 캡슐 같은 것을 구입할 길은 없었다. 진통제 등으로 사용되기는 한다지만 내겐 이런 일
에 가담해줄 의사 지인을 알지 못했다. 알고 지내는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부탁할 만큼
가깝지 않았다. 때문에 어떻게든 직접 구해야 할 형편이었다. 처음에는 알코올 주사를 생각했지
만 치사량이 너무 높았다. 정맥 주사를 한다고 해도 수백 ㎖를 쏟아 넣어야 했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방식이 아니었다. 확실히 죽는다는 보증이 없을뿐더러,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고통을 느끼
지 못하는 채로 끝맺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무미건조함이 원인이라면 수단까지 그래선 안되었
다.

 테트로도톡신을 분리정제해내는 건 고급기술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불순물이 섞여있
든 아니든 치사량 이상만 투입된다면 인간은 죽는다. 수산물 시장 중매인에게 따로 부탁하자 구
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직접 구입한 뒤 복 요릿집에 가져가 조리를 부탁하면 약간의 품
을 들이는 대신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탓에, 부탁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고 했다. 그걸 가져와 배
를 가르고, 정상적인 조리법에서는 버려야 하는 부분만을 취할 생각이었다. 캡슐 형태 따위로 파
는 정제물과 비교하면 어이 없을 정도로 싼 가격이었다.

 그 사이에 난 리스트를 정리했다. 우선 내가 지금까지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을 써내려갔다. 아
버지의 일 이후로 소원해진 가족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직장에서 같이 일한 동료들까지. 나는 전
화번호부나 이런저런 친구목록을 잘 지우지 않는 편이었다. 그 기록들과 졸업 앨범 따위가 이래
저래 도움이 되었다. 죄다 적고 나니 참 많기도 많았다. 한나절을 꼬박 들여 적고 나니, 수백 명을
헤아리는 목록이 거기 있었다. 서른다섯 번째 생일 한 달 전 즈음인 어느 날의 일과였다.

 그 다음 날부터는 목록을 프린트해 그 중 내가 다시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골랐
다. 정확히는 만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붉은 펜으로 한 명 한 명 목을 치
듯 그었다. 가장 먼저 심판협회와 연관해 떠오르는 이름들을 지웠다. 그 중 만날 마음이 드는 인
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괜히 그 이름들과 마주해 역한 기억들만 살아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름을 보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들도 지웠다. 그 두 가지 필터만으로도 목록은 절반 이하로 줄
어들었다. 기백 명의 이름을 훑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점심은 전날 밤 미리 만
들어 식은 카레를 전자렌지로 덥힌 밥에 얹어 먹었다. 카레와 밥이 닿는 면에서는 오묘한 열의 재
배치가 이어졌다. 나는 그런 애매한 온도차를 좋아했다. 그리고 잠시 집 근처를 걸었다. 식사 자
체가 늦었던 지라 이미 해는 최고점을 지나친 상태였다. 겨울 해는 오늘도 고도가 낮았다.

 거리의 공기는 평소와 조금 다른 듯 했다. 평시와의 괴리는 동네의 공업고등학교 앞을 지날 적
에 훅하고 와 닿았다. 폰으로 찾아보니 오늘이 수능 당일이었다. 교문 앞에 사람들이 잔뜩 붙어
있는 꼴이 무엇인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내가 보았던 수능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날을 지나온 지가 너무 오래된 것인지 다른 기억과 계속 섞여 분간이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까지, 삶은 오로지 시험을 치기 위해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험은 끝도 없이 있었다. 매년, 매학기, 매분기, 매주 크고 작은 시험들은 끝도 없이 몰려들었고,
아무리 해치워도 끝은 나지 않았다. 반으로 예리하게 잘라낸 시험은 증식이라도 하듯 다시 살아
나 다른 이름으로 달려들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험의 행렬은 5년 전에야 끝이 났
는데, 그건 다시 말해 내가 태어난 지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마지막 것은 일종의 취직 시험
이었는데, 그게 끝나자 시험이라고 이름 붙은 시험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다만 그
후로는 매일의 삶이 시험장이었다. 시험지는 선택지의 개수도 알 수 없는 형태로 날아들었고, 정
답은 늘 그 문제 밖에 있는 듯 했다. 나는 그걸 풀어내는 데에 늘 실패하곤 했다.

 나는 걸으며, 승부조작 사건 때의 일을 돌이켰다. 누가 중간에서 흘렸는지 동기인 정욱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자신을 찔렀음을 알았다. 정욱은 다른 관련된 이들과 입을 맞추고 내가 자신들과
원래 한패였다가 튕겨 나간 것으로 주장해댔다. 어디선가 내 신상과 행선을 여기저기서 캐오고
그걸로 한편의 이야기를 꾸며냈는데,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섞어놓은 그 정교함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었다. 나는 그 서사를 따라가며 반박하는 것조차도 벅찼다. 이왕 인생 조지게 생긴 것, 내게
해코지라도 해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협회는 그 의심 자체를 꼬투
리 삼아 날 쫓아냈다. 정욱은 단순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 아니었고, 이런 밑밥을 깔 깜
냥이 안 되었다. 사실 내가 지금 가장 만나보고 싶은 자라고 하면 그 판을 짠 작자였다. 대체 어떤
인간이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나서 무얼 하고 싶은지도 스스로도 명확치 않았다. 그 앞에
서면 주먹다짐을 하게 될까 아니면 저주의 말이나 퍼붓고 말게 될까. 그때가 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나는 그 상대가 누구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삼 일에 한번 하던 산책을 끝내고 나자 해는 기울어 넘어가는 중이었다. 점심에 하던 작업을
마저 해야 할 참이었다. 계속 이렇게 느긋이 굴다가는 제 시간에 맞추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이 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지나친 공고 앞은 표정이 많고 다채로웠다. 절망과 후련함과 슬
픔과 환희가 몽쳐 복잡했다. 나는 그 앞을 표정 없이 걸었다.

 집에 와서 어디 상처가 나지 않았는지,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곤 다시 자
리에 앉아 가족 친지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워나갔고, 어설픈 거리의 학교 친구와 선후배도 차례
로 그었다. 빨간 줄의 행렬이 이어졌고, 아직 남아있는 이름들이 눈에 띄지 않기 시작했다. 다시
목록을 정리하고 출력했다. 하루는 쉽게 흘러갔다.


/壘의 空過

 형사가 나와 유진의 관계를 어떤 것으로 적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형사과 사무실 천장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결국 알아서 쓰라고 말했다. 조사를 마치고 나올 때 형사는 자신이 작성한
서류의 내용을 프린트해 내게 내밀고, 틀림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했지만 난 곧장 맨 뒷장으로 넘
겨 지장을 찍었다. 형사는 수사 진행 상황에 따라 추가로 소환 조사가 있을 수 있고, 정황을 보아
살인 용의자 혐의를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자살방조죄로 기소될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주소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나는 조사 받으며 떠올렸던 그
인과들을 쉼 없이 머릿속으로 반복할 뿐이었다. 유진과 다시 연락이 닿고, 만나고 지금에 이르기
까지의 기억들 말이다. 곱씹을수록 기억이 비어있는 부분들만 더욱 궁금해졌고, 순간순간 내가
내뱉은 말들의 어미들만 거듭 거슬렸다.

 리스트에 최종적으로 남은 건 다섯 명이었다. 3주에 걸쳐 리스트에서 골라낸 인물들을 하나하
나 만났다. 우습게도 볼 마음 없는 이들을 전부 쳐내자, 남는 건 살면서 부대꼈던 여자들뿐이었
다. 내 인생의 요약본을 내려다보며 스스로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섯 명을 주욱 이
었을 때 내가 살아온 인생 곡선이 대강 그려진다는 건 재미있는 동시에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그건 초등학교 때 흔히 하던 식의, 점을 이어 그래프를 그리는 작업을 연상케 했다. 그래프에서
방정식을 유도해 내는 걸 나는 늘 어려워했다.

 차근차근 연락을 돌렸다. 처음엔 쉽게 통화 버튼을 누르기 어려웠다. 번호는 다 찍어놓고 30분
을 고민하다가 비로소 눌렀는데, 모르는 사람이 그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멈춰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까지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는 건 아니었다. 세 번째 즈음이 되어서야 거리낌이 없었다.
오랜만에 연락한 그 어색한 간극도 결국은 으레 하는 적당한 말들로 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렇게 리스트를 마저 하나씩 지워나갔다.

 물론 다섯 명 모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중 대부분은 만날 수 없었다. 3년 전을 마
지막으로 스쳐갔던 사람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집 앞 공중전화로 걸었을 때야
비로소 받은 걸 보면, 아마 아직까지도 내 번호를 차단해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통화가 연
결될 때 이미 반응을 각오했다. 덕분에 내 신원을 밝힌 뒤 이미 수화기를 귀에서 떨어뜨려 놓았는
데, 의외로 전화기 건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1년 3개월 전에 결혼해 잘 살고 있다고 담담히 말
했다. 통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조용하지만 단호하
게 고했다.

 이전부터 해외를 전전하던 한 명은 이름도 잘 모르는 남미 작은 나라로 아예 이민을 떠났다고
대학 동아리 동기가 전해주었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지옥은 어디에나
있는 법 아니겠는가. 중학교 때의 첫 사랑은 봉쇄수도원에 들어간 지 8년이 되었다고 했다. 경상
도 어디엔가 있다고 했는데 당연히 내외로 출입이나 면회는 불가능했다. 봉쇄수도원 수녀들이
보통 10년에 한번 외출을 나오는 걸 생각하면, 2년은 지나야 했고, 그 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연유로 거길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한 명은 마지막으로 본 게 9년 전인 여자였다. 나보다 네 살 많았는데 순진한 사람이었다.
오르골 같은 소품들을 좋아하고 수집했는데,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라면 사진을 뽑아 방에 붙
여놓았었다. 사진 앞에는 해당하는 물건이 들어갈 공간을 비워놓았고, 혹여 나중에 가지게 되면
전시할 공간을 확보해놓는 것이라 했다. 세 다리를 건너 만나 소개를 받은 사이였던 데다가 생활
반경이 겹치지도 않았다. 때문에 헤어지고 난 뒤 연락하거나 우연히 마주칠 일은 없었다. 다만 술
에 취했거나 외로움이 칼이 되어 근육과 뼈 사이를 도려내려고 할 때, 지우지 않은 그 번호로 메
시지를 보낸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전화를 걸 용기는 없었다. 서로 등 돌린 날로부터 나흘 뒤,
택시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뒷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전화번호는 아
직 살아있었고, 다만 자동으로 여동생 번호로 걸리게 되어 있었다. 동생은 나에게 언니와의 관계
를 물었다. 나는 지인이라고 어물쩍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그 오르골 사진 등이 지금은 어느 쓰레
기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있을지 문득 상상했다.

 마포 경찰서 본관을 빠져나와 정문을 빠져나오자 대로변은 바람이 찼다. 조사는 열 시간 넘게
걸렸고, 나는 같은 이야기를 십수 번이나 반복해 지쳐있었다. 12월이었지만 경찰서 건너편엔 바
로 검찰청과 서부지방법원이 자리 잡았던 탓에 연말 분위기는 그다지 풍기지 않았다. 조금 걸어
공덕이나 신촌 쪽을 향한다면 다르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당장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신
촌을 다시 들를 생각은 들 리가 없고, 공덕은 며칠 전 거기서 혼자 술 한 잔하며 장소에 이미 작별
을 고했었다. 서로 간에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뒤, 동선이 겹쳐 다시 마주하는 건 언제나 어
색한 법이다. 폰 배터리도 다 떨어졌고 가방엔 책도 없어 읽을거리가 애매했다. 버스를 기다리면
서 시간을 때울 것이 없자, 뇌는 멋대로 요 며칠 간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 서른다섯 번째 생일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을 향했다. 본래대로라면 내가
이미 거기 누워있었어야 했다.


/eephus

 ─그다지 관심도 없으신 거 같은데요, 뭘.

 나는 상원을 바라보며 말했고, 상원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그 작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캔에 남은 식혜를 마저 들이키는데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처
음에 흔하고 옅다고 생각했던 상원의 얼굴은 이제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피식자의 보호
색인가 의심했던 무존재감은 오히려 포식자의 의태에 가까웠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잠깐 앉죠.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상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병원 벤치 한쪽 구석에 걸
터앉아 있었던 지라 상원은 반대편 구석에 앉아도 충분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원은 굳이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벤치로 가서 그리 자리 잡았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2.5미터 거리를
두고 서로 정면을 마주 보는 상황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상원이 본 내 표정이 어땠을지는 감
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상 무탈하게 치르십쇼.

 ─나 당신 압니다.

 ─예?

 나는 이 작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상원은 어느 샌가 담배를 한 대 물고 불을 붙
이고 있었다. 대가 가는 담배였다.

 ─나 당신 안다구요. 어디보자. 나이는 서른넷? 이제 다섯인가. 강원도 간산 출신에 프로야구
심판 2군에서 하다가 관뒀고. 유진이하고는 1년 반 정도 사귄 다음에 3년 전에 헤어졌고. 그 즈음
엔 충정로 살았었죠. 차는 계속 그 아반떼 몰아요? 차 관리 좀 엉망으로 하시던데 아직 굴러다니
나 모르겠네.

 ─당신 뭐야.

 반 즈음 일어서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는 되물었다. 정식으로 사귄 적 없다는 무의미한 말
은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상원은 오른손으로 담배를 들고 왼손은 뒤로 뻗어 몸을 지탱하며 앉
은 채 기지개를 펴보였다. 아까 잠깐 느꼈던 것이 다시 느껴졌다. 상원의 동공 안에서 숨 쉬는 무
언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이물을 담고 있는 상원은 나른한 인상 위에 어설프게 사람 좋은
양 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거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냥 사람 찾고 쫓고 기억하고 하는 게 일이라서 그런
거니까. 얘기나 좀 하자는 겁니다. 한 대, 필래요?

 그러면서 담배를 내밀었고, 나는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알러지 때문에 담배는 피운 경력이 애
초에 없었다. 몸은 어느 새 마른 행주가 싱크대에서 미끄러지는 마냥 다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상원을 노려보았고, 상원은 담배를 깊이 피웠다. 깊이 들이쉬고 조용히 내쉬
었다.

 ─다들 자기가 관심 있는 것들을 싹 훑고 공부하고 외우고 그러잖아요, 타자나 투수 기록 같은
거.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관심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게 취미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면 자기 아내랑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질 수도 있
을 것이고, 취미가 직업이 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리도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멍하니 듣다가, 찬 공기가 옷깃과 피부 사이로 파고들어 목
덜미와 등줄기를 내리 핥았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고 어제 유진과 나눈 대화의 편린들이
슬쩍 되살아났다. 변호사라던 남편이 요새 무얼 하는지 유진은 말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남편
이 얼마나 무색무취한 인간인지에 대해 말했고, 상원이 종종 두려워질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말
했을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었다. 늘 그랬듯이 알코
올은 쓸데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뇌의 속도를 한껏 늦춰주었고, 어느 순간 그 늦춤이 지나쳐 나는
흘러가는 말들에 추월당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 하소연의 내용은 파편화되어 지금
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상원은 계속 이야기를 얹었다.

 ─말이야 말이지. 여기 올 상황 아닌 거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아요? 뭐 저야 이런 인간이니
별 상관없다지만 아까 봤잖아요. 난장 치는 거. 멱살에 따귀에 뭐 그냥 있는 건 죄다 퍼부으시던
데 좀 화통한 양반들이셔야지. 보기만 해도 얼얼하던데 뭐 괜찮으신가 모르겠네.

 생각건대 상원이 내 신상을 읊어댔던 것이 내게 생각보다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상원
이 주절대는 중에 나는 그 자가 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몇 가닥 아는 것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떠들어댔을 뿐임을 알았다. 이 자는 딱히 나를 의심해서 하는 대화가 아닐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가 맑아지고 사고는 명징해졌다. 상원이 대체 무얼 바
라고 이 대화를 끌어가는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그다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짝 찡그리며 상원을 바라보았다. 상원은 이제 뭐 숨기는 것 없이
뱀의 혀를 나불대고 있었다. 나는 그 말허리를 끊었다.

 ─뭐 못 올 것도 없지요. 장례식장에서 큰 소리 나는 거야 드문 일도 아니고. 상주신데 이렇게
오래 자리 비우고 계셔도 되나요. 조문 온 분들 기다리시겠는데요.

 상원은 눈을 바로 떠 나를 바라보았고, 감정 없이 공허해 보였던 그 망막 안까지 서로의 시야가
닿았다. 완전한 무색이라고 생각했던 그 안에서 나는 무언가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눈을 이전에 본 기억이 있음을 떠올렸다.

 ─이 쪽이 더 재밌잖습니까.

 그건 불순물 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tag-up

 완전히 위를 보고 누워서 더 이상 몸을 움츠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얼굴이 시
야에 슬쩍 들어왔다. 평소 말이 없던 3학년 선배였다.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고 야수조인
나와 엮일 일도 없는 투수조 사람이었다. 주전에도 들지 못하고 그렇다고 주전 자리를 차지하려
는 열망이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십 수 년 전 기억이고 트라우마로 인
해 그 즈음의 기억은 풍화가 많이 일어난 편이지만, 사건 자체를 잊을 순 없는 일이었다.

 몸은 곳곳이 쑤셨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터진 입술
이 따갑고 폐 근처가 찌르는 듯이 아팠다. 왼쪽 손가락도 어딘가가 망가졌는지 힘을 줄 수가 없었
다. 나는 쓰러진 채로 몸 이곳저곳을 차례대로 움직여 보려했고, 그때마다 신경 다발은 격통을 내
뇌로 쏘아댔다. 그때 이미 늑골을 비롯해 온몸의 뼈가 다섯 대 부러져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안 사
실이었다. 부러진 뼈들은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뒤틀려 신경을 건드렸고
그 신호들이 뇌에 도달할 때마다 나는 움찔거렸다.

 ─아프냐?

 머리통은 시야에서 들어왔다 사라졌다를 몇 번 반복하더니 문득 그렇게 물어왔다. 고개를 돌
리기도 쉽지 않아 그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도 안에서부터 부어오르기 시작한 입에서
소리를 짜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개를 움직이는 게 나았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보였
다.

 이런 사건사고의 처음이 늘 그렇듯, 시발점은 별 것 아니었다. 인근 학교와의 친선경기가 끝났
고 승전이었기에 감독은 닭을 샀다. 닭에는 콜라가 딸려오기 마련이었는데, 김빠진 콜라를 싫어
하는 인간은 한둘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러한 작자들은 스스로 뚜껑을 닫는 수고를 감수하고 싶
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 정신 나간 놈들은 병뚜껑을 닫는 전담요원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그건 하급생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게 그걸 왜 개기냐. 병신아.

 툭 던지듯 말하는 것이 들렸다. 직후 선배의 머리통이 다시 보였는데 그 위에 얹힌 표정이 무엇
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시야가 아직 뿌옜다. 다만 말투에서 걱정하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뚜껑에 대한 집착이 도를 지나쳤다는 거였다. 회식자리의 막내가 열린 뚜껑을 잠시
라도 방치한다 치면 그 자리에서 곧장 따귀가 날아들었다. 그렇게 몇 번 당하고 나면 사람은 금방
기계가 되었다. 그날 역시 1학년들은 닭의 살을 뜯어내면서도 눈은 병뚜껑을 쫓았다. 그 자리에
는 그저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1학년생이 중
간에 잠시 한눈을 팔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손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 광경을 더 이상 참지 못했
다. 그런 이야기다.

 그 와중에 선배는 사뭇 진지하게 내 몸 곳곳을 툭툭 차보았다. 어떤 곳에선 격통이 올라왔고,
어떤 곳은 촉감만이 느껴졌다. 대체 무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들어
가서 남은 고기를 뜯는 모양이었고 주변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는 문득 이렇게
물어왔다.

 ─들리냐. 내가 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었다. 여기서 풀어 봐도 되겠지? 지금이 기회인 거 같다
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답할 수 없어 그저 찡그렸고, 그저 내 표정이 부정의 의미로 읽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건 기본적으로 상대가 그 반응을 받아들일 의지가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예전부터 메꾸고 싶은 빈칸이 있었다. 거의 5,6년 정도 되어가는 빈칸인데 아무래도 채울 기
회가 없었지. 여기가 안성맞춤이다. 볼 사람도 없고 내 단독 책임이 되지 않을 건덕지도 있지. 네
가 녹음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더니 발걸음 소리는 잠시 동안 멀어졌다. 먼 거리는 아니었다. 해봐서 서너 발자국 정도의
거리로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체크해보자. 아버지는 분명히 죽었고, 어머니 쪽이 남아있던가. 뭐 재혼했고 너
에겐 딱히 관심도 없는 창부 같은 여자니까 별 문제 없겠지. 넌 분명히 조부모하고 같이 살고 있
었잖아. 그치.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고, 뒤통수에 둔탁한 통증이 엄습했다. 직후, 통증은 암전하듯이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4월 24일. 그것이 내가 살면서 느낀 마지막 통각이었
다.


/inside-the-park home run

 ─내가 아무리 젊을 때 창녀 같이 살았어도 이딴 대접 받으면서 살 이유는 없다구! 시팔!

 옆자리 여자는 계속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었다. 서른 중반 즈음 되어 보였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이였다. 어떤 연유에서 이 시간 이 바
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저 슬쩍 곁눈질이나 해가며 홀짝였다.

 여자는 꽤 비싼 술을 병째로 주문했고 혼자 비울 수 없는 양이었다. 바에는 주인장과 유진, 나
셋뿐이었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여자는 우리에게 연신 술을 따라주었다. 이미 어느 정도 취
해있었던 탓에 술의 이름을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만 알코올에 절여진 코와 혀에도 그 맛
은 독했다. 온더락이라도 부탁했어야 하나 하는 후회를 잠시 했다. 그리고 여자의 등장을 돌이켰
다.

 막차 시간이 지난 즈음이었다. 안쪽의 테이블석을 차지하고 쑥덕대던 사람들은 한두 명이 일
어나기 시작하자 우르르 무리를 해쳤다. 바는 일종의 길쭉한 아일랜드형 주방을 떠올리게 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담소하며 잔을 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안쪽
에는 주인장이 앉아 음악을 틀었고 둘은 나란히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붙어 앉는다는 건
일견 친밀해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멀게 앉는 방법이었다. 같은 방향을 보고 앉는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유진과의 대화는 매끄럽지 않았
다. 쌓인 시간은 간극이 되었고, 그 깎아지른 절벽을 뛰어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는 모든 걸 부수면서 그 공간으로 요란스레 끼어들어 왔다. 애초에 계단을 걸어 올라올 때
부터 소리는 요란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동작 또한 소란스러웠다. 바 건너편에 자리 잡은
여자는 이미 혀가 살짝 꼬여있었다. 메뉴판을 슥슥 넘기다가 무언가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발음
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주인장에게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찍어보였다. 주인은 고개
를 끄덕이더니 바 뒷켠에 진열되어 있던 병 중 하나를 통째로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내 익숙한 손
놀림으로 온더락을 담아냈다.

 유진과 나는 하나 마나 한 얘기를 이어가고 있었고, 여자는 문득 끼어들었다. 내가 여자의 사연
이 일순 궁금했듯이 여자는 이 둘이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던 듯 했다. 나는 다짜고짜 물을 정도로
취해있지 않았지만, 위스키 석 잔을 단숨에 들이킨 여자는 충분히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자
는 유진과 내 비어있는 잔을 보더니 대뜸 술을 채웠고, 자신의 이야기와 궁금증을 두서없이 주워
섬겼다. 그 테이블에서 시간은 꽤나 무가치한 것이 되어 흘러갔다.

 한참을 떠드는 걸 대강대강 들어주며 알게 된 정보는 정말 별 것이 없었다. 남편과 싸우고 한밤
중에 뛰쳐 나왔겠거니 하는 추측을 하게 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유진과의 관계를 구구절
절 설명해야 하나 하는 걱정을 했지만 과용량의 알코올이 들어간 여자의 뇌는 금방 호기심을 과
거의 것으로 치웠다. 테이블을 중간에 놓고 둘러앉은 사람 넷은 주거니 받거니 했고 어느 샌가 시
간과 대화와 정신은 그냥 흔한 파편이 되어 작은 바 안을 떠돌았다.

 여자가 주인장에게 곡을 신청하고 거기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 유진은 남편에 대해 말했고 나
는 내 끝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차피 모든 것이 흐느적거리며 무너져 내리는 동안 그런 것들은 아
무래도 상관이 없어 보였다. 혼자 춤추던 여자는 이야기하는 둘에게 뜬금없이 다가와 팔을 잡아
끌었다.

 ─좋아하는 거 아냐? 좋아하면 춤추라고. 애야? 이제 쭈뼛거릴 나이도 아니면서 왜들 그러는
데? 춤추면 되잖아.

 무슨 논리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수년 만에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 유진과 나는 그
야말로 쭈뼛거렸고, 서로 엉거주춤한 채로 있자 여자는 다시 짜증을 냈다. 휘말리고 싶지 않았는
지 주인장은 컴퓨터로 무언가를 검색하는 척 했다. 손만 마주잡은 채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유진은 눈을 흘기며 살짝 리듬을 탔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그 난장판 속에서 여자의 남편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가격을 물었다. 남자는 카드를 긁었고 여자는 손을 뿌리쳤다. 테이블 위에서 혼자 부르르 떨리던
여자의 휴대전화를 남자가 챙겼다. 여자는 마지못해 잡혀 나갔다. 주인장과 나와 유진은 그 일련
의 과정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좋아 보인다. 그치.

 유진이 물었다. 나는 살짝 끄덕였다. 음악은 아직 흘러나왔지만 적막이 흘렀다. 녹아내려 공중
을 떠돌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했다. 잔치는 끝났다. 둘 다 유리조각 같
았다.


/suspended game

 날 똑바로 바라보는 상원의 눈은 그저 나라는 인간에 대한 흥미로 가득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
이라고 한다면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을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건 그것과는 달랐다. 인간의 감
정은 늘 복합적이고, 그건 분노에 휩쓸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1군 콜
업이 걸린 경기에서 선수들은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담긴 눈빛을 보이곤 했다. 마스크 뒤에서 넘
겨다보는 그 표정들은 절실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워 인간이었다. 상원의 그 인간 같지 않은 눈을
보며 난 그네들을 문득 떠올렸다.

 ─뭐 제가 그렇게 흥미로운 인간은 아닌데 말입니다. 뭐가 재밌을지 전 잘 모르겠네요.

 상원은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

 프로 레벨에서의 승부 조작은 순위나 기록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프로는
이미 그 판의 먹이사슬 맨 위에 자리하고 있기에 더 위로 가기 위한 부정 같은 건 이루어지기 어
려웠다. 기록을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인간은 없고 결국 가치란 돈으로 환원되는 법이다. 조작
과 거기에 연관된 스포츠 도박 건으로 1군이 한참 시끄럽고 난 후에 도박사 놈들은 다음 판을 찾
아 헤맸다. 다른 종목으로 떠나간 작자들도 있었고 몇몇은 2군 구석으로 스며들어 판을 벌렸다.
TV 중계가 되지 않고 2군에서의 성적이 연봉 등에 직접 연관되지 않다 보니 브로커들은 더 활개
를 쳤다. 언어도단일지 몰라도 ‘프로’ 도박사들은 도박을 하지 않았다. 큰손들이 내부 정보를 꿰
고 주식 시장에 들어가듯 그 작자들도 결과를 정해놓고 돈을 건다. 호구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말이야 승부조작이지만 사설에서 실제로 승패를 놓고 도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시행되어야 돈이 빠르게 돌고 수익도 크다. 사다리 타기 같은 원초적이고 반복 시행
이 빠른 것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이 쓰레기들은 투구 한번 한번을 게임으로 만들
기 시작했다. 애초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베팅할 준비가 되어있는 버러지들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질지 볼을 던질지, 타자가 스윙을 할지 하지 않을지. 그
순간순간마다 누군가의 연봉, 누군가의 생활 밑천에 해당하는 돈이 공중을 오갔다. 이건 한 경기
내에서 최소 백 수십 번은 반복되는 게임이었고, 또한 전체 승부를 틀지 않으면서도 조작이 가능
했다. 그리고 브로커들은 그 중 몇 판만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녀석들은 처
음에는 선수들과 접촉하려 들었다.

 ─단순한 퍼즐 같은 거에요. 그냥. 아니 퍼즐보다는 보드게임 느낌일라나. 그런 거 있잖아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패를 들고 있나. 간파하고 파훼하는 게 주가 되는 것들. 그런 거라
면 아무래도 좋은 거죠. 그런 의미에서 꽤나 흥미롭다는 겁니다.

 여전히 긴장을 놓아서는 안됐다. 상원이 게임이라 표현한 것처럼 나는 그 자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어쩌면 내 실언을 기다리며 녹음기를 돌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진
의 죽음이 내 책임이 되는 불상사를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수 시간 동안의 경찰 조사만으로도 난
이미 지쳐있었다. 이런 쓸데없는 일로 끝이 연장되는 건 사절이다. 다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상
원의 눈빛에서 느껴지던 그 꺼림칙함이 뭔지는 알 수 있었다. 하나의 순수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
을 때 눈은 광기를 띄게 된다. 그에 버금가는 광기를 나는 한참을 봐왔었다.

 ─그런 이유로 흥미로우려면 저와 무슨 내기라도 거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 그런 기억이
딱히 없는데요.

 상원은 씨익 웃어보였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말려 올라간 그 입꼬리를 보고 내 머리는 홀로 팽팽 돌아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브로커들
은 처음에 2군 붙박이들을 꼬드겨 매수했다. 주로 ‘운영선수’들이 그 먹잇감이 되었다. 2군 리그
는 그 안에서의 승패가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선수들에게 2군은 1군이라는 제대로 된 무대로 올
라가기 위한 통과의례나 다름없었고, 구단에게는 선수를 키워내는 농장 역할이었으며, 누군가에
게는 낙오한 자들이 머무는 귀양지였다. 구단에 따라 공개를 하고 말고의 차이는 있지만, 코치진
사이든 선수 사이든 간에 ‘육성군’과 ‘운영군’은 암묵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육성군은 차후 1군
에서 써먹기 위해 키우는 이들이고, 운영군은 1군을 오가는 선수들 자리를 메꿔주어 그야말로 2
군 경기를 운영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선수들이었다. 말이 좋아 운영군이지 평생 최소 연봉이나
받으며 2군에서 구르다가 기록도 없이 사라지는 뭐 그런 인생들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잠재력이
터질 날이 올 거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들은 늘 쪼들리기 마련이었다. 2군에 발목이 잡혀 나아
가지 못한다 해서 사랑이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고, 아비의 지갑이 빈곤하다고 해서 아이들이 자
라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도박사들은 호구들의 주머니를 빨고 등치는 동시에, 운영군 선수들도 다른 축의 호구로 삼았
다. 전체 판돈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한 돈이었지만 한 푼이 아쉬운 입장에서는 단비 같았을 터이
다. 그렇게 잠시의 공생이 이루어졌고 몇몇이 서로 행복한 날들이 지나갔다. 브로커가 여럿 달라
붙으면서 이야기가 점차 꼬였다. 일종의 이중 계약을 하는 작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확실해야 하
는 게임의 결과가 확실하지 않게 되자 판은 어그러졌다. 3회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겠다던 녀석
이 택도 없는 볼을 던지고 와서 손이 미끄러졌다고 하는데 의심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어찌되었
건 이쪽도 치명적인 액수를 걸고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작자들은 아예 결과를 못 박아버릴 수 있는 사람을 매수하기로 했다. 같이 허덕대기
일쑤였던 동기 놈이 차를 바꾼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런 식의 인생역전은 금방 눈치 채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었고, 수사가 들어옴과 동시에 그 모든 이들의 즐거운 한때는 끝이 났다. 대한민
국 경찰의 내부고발자 보호 프로그램이 끝 간 데 없이 한심하다는 걸 나는 그 덕에 절실히 알았
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게 된 걸 후회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런 비슷한 결말이 찾아왔을 것을 나
는 미리 알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벽을 때려 찢어진 주먹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key stone

 추위에 곱았을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연신 두들기는 것은 보기에 놀라웠다. 거리 문화 조성 사
업의 일환인 것인지 유흥가 한복판에 피아노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추어인지 프로인지 알 수
없는 이 하나가 거기에 앉아 건반을 쳤다. 복잡다단한 연주였다.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
고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에 담았다. 유진과 나는 가만히 멈춰서 연주를 들었다. 한 겨울
밤의 버스킹에 사람들은 돈을 얼마씩 내밀었다. 두 곡 째에 접어들었을 때 냉기가 옷 사이로 완전
히 스며들었다. 나는 유진을 이끌었고,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는 다시 병맥주를 하
나씩 사 들었다. 취기가 가시려던 참이었다.

 거리엔 무의미한 놀이거리가 이것저것 있었다. 사격장이니 오락실이니 다들 그 임대료를 버티
며 저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가 싶었다. 소위 사격장에 마련된 에어코킹건은 쏠 때마다 탄도가 제
멋대로 휘었다. 그 총신 위에서 정조준은 오조준이 되기 일쑤였고, 타이밍을 놓친 오조준이 정조
준이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 탄도를 가지고 우리는 킬킬댔다. 각자 두어 차례를 쏘아도 경품
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안에서 몸을 덥히고 다시 나와 걷다가 꽤나 생경한 풍경에 맞닥뜨렸다. 스탠드를 포함한 널찍
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안쪽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한켠에서 악기를 스피커에 연
결해 그 자리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가벼운 무곡에 맞춰 사람들은 폴짝폴짝 뛰고 뱅뱅 돌았다. 주
변 상점들이 하나 둘 불을 끄는 늦은 밤이었다.

 유진은 먼저 뛰어 들어가 내게 손짓했고, 나는 잠시 주저하다 따라 들어갔다. 손을 마주 잡고
돌면서 나는 혹여 발을 밟아도 난 알 수 없을 거라 농을 쳤다. 유진은 웃지 않았다. 음악은 강약을
조절하며 속도를 바꾸었고, 템포가 느려질 때면 조용히 대화할 수 있었다. 유진은 내 생일을 기억
하고 있는 동시에 내 말버릇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늘 행복하지 않은 서른다섯이 찾아오면
자결하겠다고 말했었다. 애초부터 내가 자신을 찾은 이유를 유진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선
택한 수단을 물어오는 유진의 질문을 헛웃음으로 얼버무릴 수 없었다. 혼돈스런 야밤의 무도회
는 한창이었지만 우리는 어느새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키스를 해도 별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YIPS

 주말의 방들은 꽉꽉 들어차 남은 건 스위트뿐이었다. 거품이 올라오는 전동 욕조는 방 안에 자
리했고 샤워실과 화장실이 따로 배치되어 있었다. 아마 이건 흔히 말하는 ‘플레이’를 위한 배치겠
거니 싶었다. 코트를 벗어 걸고, 유진의 것도 그리 했다. 둘 다 아직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침묵은 베일 듯 날카로웠다. 나는 남은 몇 모금을 빠르게 털어 넣고 세면도구를 챙겼다. 샤워실로
들어가는 뒤에서 무언가를 찾는 소리가 들렸고, 곧 TV가 떠들기 시작했다. 불투명한 유리문을
닫자 문틀과 꽉 맞아떨어지며 나는 소리와 고립되었다.

 사실 늘 그랬다. 욕실은 평생을 내 기억의 성소인 양 굴었다. 특히나 모든 수치스런 기억은 그
안에 똬리를 틀고 24시간 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한 평도 되지 않는 그 공간에 홀로 남아
있을 때마다 몇 년을 묵은 과거들은 내 연약한 정신을 덮쳐왔다. 예컨대 첫사랑에게 던졌던 자의
식 과잉의 대사들, 예컨대 무책임하고 근거도 없던 자신감과 정의감, 예컨대 내가 바라는 낙원이
다른 이에게도 천국일 것이란 환상 같은 것들. 변기에 앉아 있을 때 그것들은 날파리 떼처럼 내
귀를 통해 뇌로 날아들었고 그 안에서 수질과 피질 가릴 것 없이 갉아 먹었다. 나는 그런 환통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는 흔히 물줄기를 받으며 흥얼거렸다. 되도 않는 멜로디라도 그걸로 머릿속을 채우
면 괴로움은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몸을 적시고 바디워시를 치덕거리고 다시 물에 흘려보내고.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를 다시 한 번 닦다가 문득 내려다보았을 때 쪼그라든 내 성기는 물살에 힘
없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고교 야구 감독이었던 아버지의 자살기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뛰어내린 곳의 높이가 충분치
못했던 것인지, 바닥의 완충물이 쓸데없이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불쌍한 인
간은 온 몸의 뼈가 아작난 후에도 죽지 못해 수십 일을 침대에 누워 끙끙댔다. 사실 우스운 이야
기다. 대학들은 시험을 치기도 전에 이미 뽑을 선수들을 골라놓았다. 그게 오히려 보통이었기에
거부하는 사람들은 판을 깨는 인간으로 몰려 린치 당했다. 서류상으로 문제가 없게 꾸미기 위해
경기의 결과는 당연히 경기의 시작보다 먼저 정해져 있었다. 인과는 곳곳에서 미리 역전되었다.
그건 마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기도 전에 아웃이 선언되는 꼴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수염도 자란 적 없는 6학년 꼬맹이였고, 아버지에게 면도를 배울 날은 그 뒤로도 없
었다. 안방 침대에 누운 아버지에게는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몸을 돌려 뉘
일 때에도 낮은 비명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곤 했다. 그건 짐승의 울음과 실상 별 다를 것 없어
보였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몸을 돌리고 나면 괴상한 모습의 플라스틱 통이 침대 밑에
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엔 늘 안방 문이 닫히고 나는 밖으로 쫓겨났다. 그렇게 쫓겨날 때 나는
종종 내 방에 가서 한참 벽을 노려보곤 했다. 그 추방은 나와 부모 사이에 선을 긋는 것과 같았고,
선은 문의 형태로 현현했다. 문의 너머는 순간순간 머나먼 우주가 되어 까마득했다.

 그게 소변을 받는 통이라는 건 한참 나중에야 안 일이었다. 같은 상황에서 나는 아이를 나가게
할지 꽤나 생각했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고민이다. 미지근한 물에 늘어져 흐느적대는
이것이 누군가를 잉태케 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수십 대를 이어 내려온 고통의 연속은 여기서
끊어내야 했다. 문 밖에 서있던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지만, 다른 가족들은 원망을 감추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갔다. 누이는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또 다시 숨 쉼의 바톤을 이어 받은 셈이다.

 어둠 속에서 나는 유진과 서로 안았다. 유진은 한참을 흐느꼈고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등에 손
톱자국이 아로 새겨졌지만 역시나 아프지 않았다.


/fake bunt slash

 거기까지 생각하고 비로소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상원이 지금까지 일종의 유희를 즐기던 중
임을 알았다.

 상원 자신은 막 부인을 잃은 홀아비의 탈을 뒤집어쓰고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 작자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건 보는 눈이 있는 장례식장에서나 하면 되는 것이고, 나와의
1대1 대화에서는 필요 없었다. 유진의 죽음은 그 순수한 호기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금
의 상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 머리통 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걸로 무얼
하고 싶은 건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상원이 왜 굳이 나를 쫓아와 이렇게 대화를 시작했는
지는 이제 기억이 났다.

 ─그때 재판에서 정욱이 쪽 변호사였죠? 이제야 생각났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라는 말까지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이제 알아보시네요. 오랜만이죠. 그죠. 잘 지내셨습니까.

 아마 시나리오는 내 눈 앞의 이 작자가 짰으리라. 그 일을 벌인 자가 늘 궁금했었다. 후보는 많
았다. 정욱의 대학선배였던 위원장, 나를 늘 아니꼽게 바라봤던 선배들, 내가 위에서 잡아 끌어주
지 않는다고 투덜대던 대학교 후배, 그 누구도 아니었다. 짧은 대화에서 확신이 들었다. 정확히는
돌아가는 나를 쫓아와 가며 이 대화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증거였다. 예고도 없이 시체로 발견
된 아내의 장례식에서, 그 아내와 전날 동침한 남자에게 뜬금없이 관심을 보인 건 다른 이유가 아
니었다. 흔한 의심에서 나온 행동도 아니었다.

 상원은 그냥 나를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불가사의한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
주한 이제 와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유진이 술을 홀짝대며 말했던 감정들이 어디서 연유했던
것인지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우주는 내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나는 멍해졌다.

 ─덕분에요. 먼저 좀 일어나보겠습니다.

 상원은 하고 싶은 걸 이미 다 했다는 양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중에 또 봅시다. 빈칸도 몇 개는 채웠고.

 내 뒤통수에 대고 마지막으로 한번 낄낄댈 뿐이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전날
밤을 생각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원에게 복수를 한 셈이었다. 다만
그건 그게 저 작자에겐 전혀 의미 없는 문제라는 걸 알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덜컹이는
의자에 앉아 몇 번이나 이 이틀을 돌이켰다. 집에 남아있는 약액을 생각했다. 이건 또 다시 시험
문제였다. 이번에도 나는 또 다시 올바른 선택지를 찾지 못할 듯 했다. 아버지가 뛰어내리기 전
남긴 유서와 같았다.


\infield fly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남자의 휴대전화는 매일 밤 2시간 반마다 주기적으로 알람을 울렸다.
남자는 한밤중에 울려대는 알람 설정을 아침에 일어나기 위한 설정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하게 여
겼다. 통각은 인간이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해서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산물이
었다. 위험한 것은 아픈 것이고, 아픈 것은 고통이 되어 피하게 한다. 잘 때에는 혈류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곧 위험한 것이었다. 피가 돌지 않는 조직은 변형을 일으키고 심하게는 괴사
한다. 그러니 이건 남자에게 꼭 필요한 알람이었다.

 침대 아래서 이제 움직이지 않는 인영이 어둠 사이로 비춰보였다. 2시간 반 전에는 꿈틀거림이
남아 헐떡대고 있었지만 이제는 멈췄다. 선택은 책임을 부담하는 행위이고, 남자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방해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 상호에 대한 존중이라 여겼다. 침대 위에서 남
자는 몸을 뒤척여 자세를 바꾸었고 다시 누우며 휴대전화를 머리 옆 탁자에 놓았다. 일은 이미 틀
어졌고 지금 와서 어찌할 순 없는 것이다. 주사기의 약액은 완전히 비어있었고, 남자에게 남은 것
은 없었다.

 2시간 반 뒤부터는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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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초에 쓰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3년 6개월만에 끝을 보는군요.
전반부는 3호선 버터플라이의 'nine days', 후반부는 leeSA의 '사람들은'에 신세졌습니다.
읽기 매끄럽지 못하지만 더 이상은 어떻게 만질 엄두가 안 나네요.

암살 - 천만 영화의 공식, 전우치의 재림 리뷰Review




간단한 감상은 사실 뭐 오전에 올린바와 같다. 상당한 예산과 수준급 배우들을 썼지만 나온 결과물이 그리 고급스러운지는 알 수 없다.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보이는데, 대사와 컷을 끊는 타이밍의 문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사실 최동훈이 <전우치>에서 보여줬던 것과 똑같은 문제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 그리고 비교적 <도둑들>에서 대사는 괜찮은 편이었다. 불필요한 말들이 곳곳에서 걸리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친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약간의 공백은 보는 이들이 알아서 채울 수 있는 것들이고, 그러한 생략에서 나오는 흐름의 틈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암살>에 그런 채움이 작용할 여지는 전혀 없다. 모든 복선과 인물과 흐름은 예고된 그대로고, 배우의 표정이나 몸짓 혹은 장치들로 한번 보여준 것들은 굳이 또 다시 대사로 내뱉어진다. 이건 러닝타임과 사고력의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실 어찌 생각한다면 이게 천만영화라는 영화들이 가져야 할 미덕인지도 모른다. 최대한 친절하고 최대한 이해가 쉽게, 그리고 추가적인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도록 깔끔하게. 연기자들의 연기는 훌륭했고 상업적으로 분명 성공한 영화다. 그러나 캐릭터는 선악이 분명히 구분되어 고민할 여지가 없고, 그건 이 거대한 세트장들을 퇴색케 한다.

복수는 나의 것 - 날것 그대로의 맛 리뷰Review




박찬욱 <복수는 나의 것> 짧은 감상.
13년 된 영화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스포일러가 있긴 있을 겁니다.

1. 어찌되었건 복수 이야기가 다채롭기는 어려운 듯하다. 당장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이나,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 등등에서도 결국에 복수의 동기를 강화하는 방법은 한정적이다. 예컨대 친족을 살해했다든지, 자신에게 위해를 가했다든지. 여기서 복수심의 강도를 강조하는 방법은 시간을 길게 묵히는 게 기본인데 <올드보이>에서 15년을 묵히는 그런 것. 일련의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결국은 복수의 실행 방식을 더욱 말초적으로 가져가야 하는 결과가 나온다. 이 역시 한정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 죽이는 방법은 사실 어느 수준 넘어가면 거기서 거기로 잔인하다. 시각적인 걸로는 <모탈컴뱃>의 페이탈리티 수준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따라서 정신적으로 아작을 내는 식으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이런 면에서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당한 방식이나 <악마를 보았다>에서 역시나 최민식이 마지막에 당하는 방식이 그럴 듯 했다. 감독들이 머리 많이 굴린 티가 나는 결말. 생각해보니 왜 둘 다 최민식이여... <복수는 나의 것>은 초기작이라 그런지 그런 발상면에서는 날것 냄새가 많이 난다. 그냥 찔러 죽이고 고작해야 자신의 주변 인물이 죽었던 방법을 변주하는 수준이니까.

2. 박찬욱이 특정신을 길게 끌고 인물 간의 묘한 긴장 상태를 묘사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알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그게 좀 과한 부분들이 보였다.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정적인 신이 많아서 약간 지루한 느낌이 종종 든다. 생각해보면 이런 버릇은 <박쥐>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 영화에 대한 내 평가를 갉아먹는 데에 일조했던 듯.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그 서로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걸 굳이 그렇게 강조해서 길게 가져갈 필요가 있는지는 잘.

3. 고어물이 될 법한 장면들은 사실 꽤 많이 피해가면서 편집한 모양새다. 그걸 직접 보여주는 대신 청각으로 대체하고, 직접 보여주는 대신 배우들의 표정 연기로 메꿨다. 비슷한 구도에서 상황에 따른 표정 차이를 보여주는 기법은 꽤나 재밌었고, 영상물 등급 심의를 절묘하게 피해가면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뭐 그런 효과도 있는 듯. 송강호나 신하균의 연기력이 뒷받침되다 보니 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4. 연작 중 뒤의 두 작품에 비해, 인물들은 훨씬 현실 세계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복수심에 불탄 기간이 그렇게 길지도 않았고, 박찬욱이 성숙하지 못했던 탓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배경 연출들도 박찬욱 특유의 그 색감 등이 드러나지 않아서... 특이한 배경이라고 치면 처음 장기적출 당할 때의 콘크리트 폐건물인데 그것도 비교적으로 현실에 발 붙여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올드보이>에서의 사설감옥이라든지 유지태의 펜트하우스, <친절한 금자씨>의 교실, <박쥐>의 집보다는 훨씬 정상적인 공간이라... 그 와중에 송강호와 신하균은 다른 영화의 인물들에 뒤지지 않는 무신경함을 보여주니 그 격차가 나름 보기 즐거웠다. 다만 신하균을 굳이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나 하는 의문.

5. 배두나 이쁘당.

4월 말 작업Works

설레이는 마음, 김현정, 2010




콘크리트 욕망 사이에도 꽃은 피었다. 흐름에 따라 밤과 낮은 자연스레 서로의 비중을 나뉘어 가졌고 자신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는 뿌리는 요란스레 꽃망울을 올리더니 결국엔 어느 순간 폭발하여 원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는데, 사실 그 모든 복잡하고 조밀한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줄기는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채지 못하였고, 그저 섬유질은 울긋불긋한 삶의 색을 이리저리 펼쳐 보이다가 습기가 없어 살짝 쪼그라 들었다가 주린 봄비라도 내릴라 치면 빤빤한 얼굴을 들이 밀었는데, 어떤 짓을 하든간에 뿌리가 자리 박은 위치를 바꾸는 것은 가능치 않은 위업이었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식물종에게 불가능한 짓거리였던 탓에, 그 안타깝고 애처로운 꽃다발은 최후의 최후에는 처음 얼굴을 내밀었던 그 시멘트 계곡의 가장 깊은 곳에서 고개를 떨구는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도저히 택할 수 없었고, 눈도 귀도 없는 삶의 뭉치는 스스로의 뿌리골무가 툭툭 건드리는 견고한 바닥이 어찌나 두꺼웁고 견고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기에 나날의 참담함은 그저 지겨울 정도로 반복될 뿐이었다. 독기는 금세 장기(瘴氣)가 되어 잎은 시나브로 속부터 썩어 들었다.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이 데려다가 화려한 휴가를 찍자 리뷰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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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의 감상입니다.  시놉시스가 그대로 전부인 영화입니다만 스포일러가 있다고 표기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1

인도네시아가 정말 상상 이상의 막장 국가라는 걸 알았습니다.
비유하자면, 한국이 50년 대에 서북청년단 등의 민병대 조직을 활용해 그야말로 좌파 완전 색출에 성공하였고, 이후 지금까지도 서북청년단이 떵떵거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부통령이나 각 부처 장관들이 해당 조직 행사에 참여하는 그런 수준.
친구 하나가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이 데려다가 화려한 휴가 찍는 영화'라고 표현했었는데, 사실 영화에 실질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실행조에 가까운 인물들입니다. 직접 사람 목 베고 교살하고 고문하던 작자들이죠. 굳이 말하자면 '안두희, 김창룡 이런 작자들 데려다가 야인시대 찍는 영화'라고 해야겠습니다.


2

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는 잔인한 신은 없습니다. 이제는 나이 든 가해자들이 스스로 재연해 보여주고 진술하고 그걸 극중 영화화하고... 그런 작업들이 있을 뿐이죠. 사실 이 영화 자체가 어떻게 보면 거대한 사기극에 가깝습니다. 남한 밑에서 벌어지던 비슷한 짓을 천명 단위에게 실행한 가해자들에게, 당신들이 해온 일을 영화화하겠다고 제안하고 그들은 받아들입니다. 물론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보다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고 양심에 따른 것이라는 생각이 훨씬 강한 이들이죠. 그네들은 자신들이 해온 일을 선전 영화화한다는 생각으로 임합니다. 그리고 그 작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당장 부통령이라는 인간이 그런 민병대 행사에 와서 일체감을 뽐내고, TV 토크쇼에서 '어멋 공산주의자들을 전부 쳐죽였다니 넘 멋져여!' 하는 나라니까요.
그 가해자들이 자신들이 했던 일들을 영화화하는 데에 있어 시나리오도 확인하고, 신도 건들고 아이디어도 내고 합니다. 그 와중에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나름의 의미들이 있으나 160분짜리 영화는 그걸 전부 분해해서 적기에 너무 길군요. 기억에 한계와 혼선이 올 지경이긴 합니다.


3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건 이러한 부분입니다. 그 가해자들이 자신의 딸, 손자에게는 너무나 자상한 인간들이고, 그 가해자들에게 일을 지시했던 작자들은 명품 쇼핑에 한정판 유리공예품을 모으고 집안에 자연사 박물관을 차리고 2억짜리 습지를 매입해 동물원으로 쓰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 작업을 통해 자신들이 무슨 끔찍한 짓을 했던 것인지 되돌려 보여주는 작업에 그 어마어마한 인력과 비용을 투자한 결과는, 겨우 한 사람의 가해자가 '내가 고문하고 죽인 사람들이 고통스러웠겠구나' 하는 [인식]을 하게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는 거죠.
수십 년 간 쌓인 그 무수한 자기합리화와 재교육, 미래세대에 대한 세뇌 같은 것들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되는 사회적 비용이 투입되어야 할까 하는 상상에서 비롯하는 그 절망감과 끔찍함. 그 와중에 가장 값진 선물을 쥐여주는 후보에게 표 주는 것이 당연하고, 선거 유세하는 후보에게 대놓고 선물을 요구하는 그 시민들. 뭐 민정다이소와 비슷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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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인구는 2억 4천만 가량. 세계 4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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